압구정동 일기 2003

by 토미타 타카시
with 이은주

2003년 8월4일

“들어오시죠?”
내가 커피숍 앞에서 잠시 메뉴를 보고 있었더니 가게 주인인 듯한 남자가 다가와 말했다.
“아! 아뇨, 그냥 메뉴만 좀 보고 있을 뿐입니다.”라고 난 다소 당황한 투로 대답을 하고는 그냥 지나쳐 가려고 했다.

그런데 부담가지지말고 들어오라는 말에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어 그를 따라 커피숍 안으로 들어갔다. 사실은 내일부터 한국어 수업이 끝나면, 개인교사를 고용해 예습.복습을 하기위해 적당한 장소를 찾고 있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커피숍 안은 꽤 넓었고 다소 한적해 보였다.
“이런 조용한 분위기라면 공부하기에 적당한 것 같긴 한데….”난 속으로 생각하면서 커피숍을 한번 휙 둘러 보았다. 그리고는 조금 구석진 곳이지만 가장 조용해 보이는 자리로 가 앉으려고 했다.
그런데 가게 주인이 자기가 앉았던 앞자리를 가리키며 “거기 앉으세요”라고 하며 나에게 앉기를 권해 난 얼떨결에 그와 함께 동석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리에 앉자말자 다짜고짜“일본에서 오셨어요?“ “어이, 미스김! 여기 커피하고 케익 좀 가져와라”하고 여종업원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잠시 후 여종업원이 공짜 커피와 케익을 내어왔고, 가게주인은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이야기들을 장황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는 마치 따발총이라도 단 듯 쉴 틈없이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난 일본에 100번 이상이나 다녀왔어요. 그리고 내 아들은 미국 브라운대학을 졸업했답니다. 이 가게는 한국에서 가장 큰 커피숍 체인점이고 그중 두 가게를 내가 소유하고 있어요. 난 로타리클럽 회장을 맡고 있는데 청각 장애인들을 위해 보청기를 보낸 적도 있답니다. 그리고 여기 있는 이 사람은 우리 집사람입니다. 그는 신문기사에 실린 한장의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부인은 아주 미인이었다.) 우리 가게는유명한 일본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설계를 했어요.”등등….

내가 말할 틈도 없이 자신의 이야기만을 늘어놓던 가게주인은 이번엔 나에게 질문 공세를 쏟아붓는다.
“일본 어디에 살아요? 가족은? 한국엔 언제 왔어요? 언제 갈 예정이죠? 지금 묵고 있는 숙소는 어디예요? 아! 삼화호텔이구나.방번호는요?”

가게주인은 메모를 해가면서 끊임없이 질문을 계속 해 왔다. 도대체 난 유명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북한에서 내려온 간첩도 아닌데.... 단지 공짜로 대접받은 커피와 케익때문에 이렇게 나의 개인적인 정보를 이 경찰

(?)아저씨에게 취조당하듯 말해야만 했다.

드디어 "경찰" 심문이 끝났다.　그리고 아주 만족스런 미소를 띄우더니 이번엔 “자, 이제 사진 한장 찍읍시다.그쪽에 앉으세요.그리고 우리 가게앞에서도 한장 더!”

도대체 이런 경우를 어떻게 생각하면 될까?
이 아저씨의 취미? 아니면……….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가게주인은 결코 나쁜 사람은 아닌것 같았다.　단지 할 일이 없고 심심한 탓에 나와 같은 외국인에게 관심을 내보이고 호의를 베푼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다 전형적인 한국 아저씨가 아닌가.


2003년 8월 5일

“학원으로 가는 버스 노선 간단하죠? 오는 버스를 타고 두번째 정류장에서 내리면 돼요.” 언젠가 누군가가 말했다.　그 기억을 더듬어서 난 오늘 학원에서 호텔까지 돌아가는 길에 올 때 타고 왔던 버스를 도로 탔다.　

하지만 학원으로 가는 노선과 호텔로 돌아갈 때의 노선은 달랐다.　결국 내가 탄 버스는 압구정동에서 한강을 건너 동대문 방면으로 거침없이 가 버렸다.　순간 나에게 좋은 생각이 떠 올랐다.“그래.　700원으로 서울 구경 할 수 있잖아.　그럼 이 버스가 가는 종점까지 가보자.”

결국 난 마로니에 공원이라는 곳까지 갔다.
많은 젊은이들이 거리 예술가들의 연기를 보면서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내려쳤다.　아마도 한 줄기 할 모양이었다.
“아, 어쩌면 좋지! 미술관도 구경하고 싶은데……하지만 돌아가야만 한다.” 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저기 아저씨! 지하철역이 이 근처 어디에 있죠?” 나는 둥근 돌 위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나이가 꽤 들어보이는 아저씨에게 물었다.
“저기야.　오른쪽으로 곧 바로 가면 있는데, 근데 일본에서 왔어?”
“예”
“한국의 거리는 일본에 비해 많이 다르지?” 갑자기 무슨 말의 맥락도 없이 아저씨가 나에게 물어왔다.
“아뇨...　한글 간판들만 없으면 마찬가지예요.”난 대답했다.
“그렇군….”다소 불만스런 표정이었다.
“난 미국이 싫어! 그 놈들은 우리나라를 분단시키고 그러고도 아직 우리 나라에 눌러 앉아 있잖아.”또다시 아저씨는 다소 엉뚱한 소재를 꺼내어 나에게 호소하듯 말하기 시작했다.

“６２５때….”　하지만 난 그 아저씨의 말을 들을 여유가 없었다.　비가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했고 천둥번개가 온 하늘을 점령해 왔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그럼 건강하세요.”

“에이씨!” 아저씨의 중얼대는 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지하철 역을 향해 바쁘게 발걸음을 옮겼다.


2003년 8월 6일

“머릿손질도 제대로 않고 나와서 죄송해요.” 머리를 손으로 누르면서 그녀는 종로 YMCA호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의 앞에 나타났다.　
기풍이 느껴지는 여자다.　벌써 두 아들을 다 키워놓고, 지금은 자신의 남은 인생을 좀더 충실하게 보내기 위해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
우리 하찌오지 한글 학습회의 우수한 회원 중의 한명이다.
“가나다학원 어때요?” 내가 물어 봤다.
“아주 좋아요.　교재도 좋고 선생님들의 가르치는 방식도 아주 좋아요.”
“우리 학원도 좋은 쪽이라구요.” 난 말했다.
“우리 선생님은 상식도 풍부한 분이라 어떤 경우라도 막힘없이 이야기를 잘 해 주신다구요.”
두사람은 인사동 술집으로 향했다.　우린 서로 환갑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마치 젊은 시절로 다시 돌아간 듯한 기분으로 이국의 거리를 함께 걸어갔다.

“S씨는 대학생 때 학생 운동했죠?” 내가 먼저 물어 보았다.　오늘은 히로시마 데이다.
“아뇨.　난 논폴리티컬이었어요.　T씨는요?”
“난 극좌였어요.　경찰들과 싸우는게 취미였죠.　하하...”

전통 술집이라고 씌여진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지하 1층의 조금 어두운 분위기였지만 나름대로 괜찮은 곳이었다.“여기로 하죠."

"아가씨, 여기 맥주 2병 주세요.”
“예, 안주는 뭘로 하시겠어요?”
“마른 안주로 갖다주실래요. 오징어나…..”

“Y대학교나 K대학교 같은 서울에서 꽤 유명한 대학들이 주최하고 있는 한국어 하기 강좌에 비하면 학원들은 실력 승부인것 같아요.　그러니까 수업의 질이 아주 좋아진다고 생각해요.” 그녀가 분석했다.

“예, 저도 동감이예요.　내가 2년 전에 갔던K대학교는 선생님들이 그렇게 성실하게 가르쳐 주지 않았던 것 같아요.　단지 유명 대학 간판 때문에 수업의 질이 그다지 좋지 않아도 외국 학생들은 많이 오니까요.　당시엔 수업이 정말이지 너무 엉망이었어요.　화가 다 나더라구요.” 내가 말했다.

귀국하기 전에 또 한번의 재회를 약속하고, 우린 황혼의 인사동을 떠났다.


2003년 8월 7일

저녁에 신문기자인 김태균이가 내가 묵고 있는 호텔에 왔다.

그를 만난지 약 5년 정도 되었다.　당시 미국 마이크로 소프트사가 한국의 한글 워드 프로세서 소프트인 “아래아한글”을 없애려고 그 대표인 빌게이츠가 더러운 책동을 하고 있었다.

“아래아한글”이라고 하면 일본의 “이치토로오”에 준하는 국민적인 워드프로세서 소프트다.　그런 “아래아한글을 지키자!”는 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당시그 소프트를 지키기 위해 한 구좌 당 5만원씩 모으기를 했었는데, 나도 하치오지 한글 학습회 대표로서 5만원을 개인적으로　송금했었다.

그리고 이런 일을 알고 있던 것이 신문기자 태균이었다.　그는“일본인 한국을 지킨다.”란 과장된 기사를 쓰고는 나한테 그 기사를 보내주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형제로서 언약을 맺어 내가 한국을 방문할 때나 태균이가 일본에 올때 곧잘 술자리를 함께 하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

우리들은 압구정동에 있는 독일 맥주집에서 여러가지 종류의 맥주를 즐기면서 밤늦게까지 정치나 경제, 또는 노무현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태균이는 현재 한국 은행을 담당하고 있다.

“일본엔 내 한국인 동생들이 세명 더 있으니까 네가 일본에 취재하러 오면 같이 만나자.　내가 소개시켜줄께.”라며 내가 말했더니, “그럼 ‘토사모’겠네요.”태균이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내가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몰라 물었더니 ”토미타 선생님을 사랑하는 모임이잖아요.”라며 태균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 그 노사모구나.” 그제서야 나도 이해 할 수 있었다. ---end